연가 13/ 마종기

연가 13


마 종 기


  1
  여자에게서 취할 것은
  약간의 미모와
  약간의 애교와
  여자에게서 취할 것은
  약간의 요리와
  봄날의 이불.
  그리고는 흩어지는 꽃잎으로
  그 이름을 떠날 것이다.

  2
  한때는 구기도 공부도 좋아하고, 한때는 포카도 술도 연애도, 한때는 음악도 회화도 시도 소설도, 그리고 결혼도 의사도 죽음도 좋아했지만 결국 한 50년 만이라도 몰입될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도 아는 놈만 안다. 번연히 오래 못 살 환자의 비밀. 멋모르는 대면의 술잔. 그리고 다음번의 목차를, 적은 소외감을. 세상에도 모르는 놈만 모른다. 잠자리에서도 소홀한 한 목숨의 경계를.


- (3인 시집; 마종기, 금영태, 마종기 공저) 평균율, 창우사, 1968

by 流火™ | 2009/04/20 17:38 | 流火의 詩選 | 트랙백 | 덧글(0)

별 / 양전형



양 전 형


  별을 따리라 맑은 밤 한라산에 혼자 올랐네
  별이여 미안하다 아무래도 나는 너를 따야겠다
  많이 따 버리면 하늘이 너무 어두울지 몰라
  이름도 없이 외로운 별 네 송이만 떼어냈네
  앙증맞게 작은 별 하나는 아내에게 주리라
  반짝반짝 빛나는 별 두 개는 아이들 나눠주고
  떠다니던 초라한 별 하나는 내 품에 안으리라

  길게 드리워진 은하수 타고 훌쩍 내려와 보니
  웬 일인가 주머니 속 별들이 순식간 없어졌네
  별은 죽으면 이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인가
  얘들아 저기 저기서 따 왔는데 라고 말하려는데
  별들은 있던 자리로 돌아가 빛을 내고 있었어라
  아 별아 정말 미안하다 너의 행복을 따려 했다니
  얘들아, 별은 멀리서 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구나

- (양전형 시집) 나는 둘이다, 한국문연, 2004


by 流火™ | 2009/04/20 17:20 | 流火의 詩選 | 트랙백 | 덧글(0)

스피드 사랑법 / 안차애

스피드 사랑법


안 차 애


  새로 산 커피포트는 저돌적인 사내 같다
  제 여자의 목마른 눈빛이나 심심한 여백을 용납하지 않는
  힘 좋고 단순한 사내
  나는 수시로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
  0.5 리터 찬물만큼의 시려움을 뚫고
  그가 나에게 달려오는 시간은 정확히 18초다
  단거리 달리기 선수보다 빠른 전력질주다
  숨소리 점점 포르테 포르테시모
  발자국 소리 시시각각 비바체 알레그로 비바체
  렌토 아다지오 라르고, 느리고 감질나는 전위는 생략이다
  그의 우유빛 몸체가 깊이 젖어드는 것이 먼저인지
  숨차게 끓어오르는 클라이맥스, 폭발적인 몸짓이 먼저인지는
  감동에 취해 나는 매번 헷갈린다
  단순한 코드의 스피드 사랑
  산뜻한 끝 매너에서 또 한번 매료된다
  투명하게 뜨거운 몇 모금의 위로,
  기꺼이 퍼 주고 식어 가는

- (안차애 시집) 불꽃나무 한 그루, 문학아카데미, 2003

by 流火™ | 2009/04/20 17:15 | 流火의 詩選 | 트랙백 | 덧글(0)

흔적(痕迹) / 진의하

흔적(痕迹)


진 의 하


  형체도 볼 것 없는
  그저 스치고 지나가면 그만일
  바람이옵니다.

  구름이 머물다 가듯
  살랑살랑 도리질하는 햇살 속
  가지 끝에나 붙어
  그림자도 남기지 못할 족적
  뜬 세월 휘감아 도는
  방랑자이옵니다.

  속없는 벌럭쿵
  무수한 가시들에 찔려 살아도
  싱그럽고 늡늡한 아름다움에 취해
  사시사철 허공만을 맴도는 곡예사
  솔개이옵니다.

- (진의하 시집) 바람의 파문, 다층, 2003

by 流火™ | 2009/04/20 16:59 | 流火의 詩選 | 트랙백 | 덧글(0)

늙은 여자 / 최정례

늙은 여자


최 정 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었다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 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 (최정례 시집) 붉은 밭, 창작과 비평사, 2001

by 流火™ | 2009/04/20 16:54 | 流火의 詩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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