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15일
작가와 몽상 / Sigmund Freud
작가와 몽상
Sigmund Freud
작가라는 특이한 인격체가―이폴리토 데스테 추기경이 아리오스토한테 물어 보았던 질문처럼―어디에서 작품의 소재를 가져오는지, 그런 소재들로 우리를 사로잡아 그러리라 생각도 못했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라는 문제가 늘 문외한인 우리의 관심사였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작가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만족할 만한 대답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커지고, 아무리 문학적 소재 선택의 조건과 시적 형상기술의 본질에 대해 통찰력을 갖춘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관심은 지속된다.
적어도 우리한테 작가의 창작과 어떤 식으로든 비슷한 행위가 발견될 수만 있다면! 그러면 그것을 연구하여 작가의 창작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망은 존재한다―작가 스스로 그들 고유의 영역과 일반적 인간존재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는 일을 반기고 있다. 모든 사람 속에는 작가가 숨어 있으며 마지막 작가는 인간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우리가 작가들로부터 듣고 있지 않은가.
문학적 행위의 첫 발자취를 어린아이한테서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집중적 행위는 놀이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는 누구나 나름대로의 세계를 만들어 내거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만의 세계를 그의 마음에 드는 새로운 질서 속으로 옮김으로써 마치 시인처럼 행동한다. 그가 이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리라. 정반대로 그의 놀이를 아주 진지하게 여기며 거기에다 많은 양의 감정을 바친다. 놀이의 반대는 진지함이 아니라 현실이다. 모든 감정 소모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기의 놀이 세계를 현실과 아주 잘 구별하며 상상의 대상물과 관계를 실제 현실의 잡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사물에 즐겨 갖다 붙인다. 바로 이 갖다 붙이기Anlehnung야말로 아이의 ‘놀이’를 ‘공상’과 구별한다.
그런데 작가는 놀고 있는 아이와 똑같은 일을 한다. 그는 공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아주 진지하게 여긴다. 감정 충전이 크다는 말인데, 한편 그는 공상 세계를 현실로부터 엄격하게 나눈다. 그리고 아이의 유희와 문학적 창작의 유사점은 연기 가능한 감각적 대상들에 대한 의탁을 필요로 하는 이런 공연들에 희극(기쁨의 놀이), 비극(슬픔의 놀이) 등 극(유희)라는 언어적 표현 그리고 그것을 연기하는 사람에게 연기자(놀이패)라는 언어적 표현을 줌으로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문학적 세계의 비현실성에서 예술적 기교에 필요한 아주 중요한 결과들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실제 재미를 가져다 줄 수 없는 많은 것이 공상의 놀이 속에서는 재미있으며 그 자체 본래 조절하기 힘든 많은 감정들이 작가의 청중과 관객에게 재미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유희의 대립의 문제를 좀더 심화시키도록 하자! 아이가 자라면서 놀이를 그치고, 삶의 힘든 일과 수십년 동안 진지하게 씨름하다 보면, 어느날 놀이와 현실의 대립을 다시 지양하는 정신적 성향에 이를 수 있다. 어른이 되니 그는 옛날에 얼마나 진지하게 놀이를 즐겼던가 생각하게 되고, 어른으로 해야 되는 진지한 일과 어린 시절의 놀이를 같이 놓으면서 일상생활의 중압감을 떨치며 유머의 진한 재미를 찾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은 놀이를 그만둔다. 겉만 보자면 그는 놀이에서 얻는 재미를 포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생활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 맛본 재미를 포기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그에게 없다는 것을 익히 안다. 우리는 원래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고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바꿀 따름이다. 포기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대리 형성 또는 대용물 형성이다. 철들면서 놀이를 그만 두는 것은 사실은 실제하는 대상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놀이 대신에 이제 그는 공상을 즐긴다. 그는 모래밭에 누각을 지으면서 백일몽을 꿈꾼다. 내 생각으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백일몽을 꿈꾼다. 이 사실은 오랫동안 간과되어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인간의 공상은 어린아이들의 놀이보다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는 혼자 놀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그들만의 심리적 체계를 이루기도 하지만, 어른들에게 아무것도 보여 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 앞에서 놀이를 감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른은 자신의 공상을 부끄러워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숨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으로서 사람들은 보통 과오를 고백할지언정 공상은 좀체 알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공상을 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여기고 사실은 다른 사람들한테도 비슷한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고는 감도 못잡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유희를 즐기는 사람과 공상을 즐기는 사람의 상이한 태도는 사실은 서로 맞물려 있는 두 행동의 동인에 그 까닭이 있다.
아이의 놀이를 주도하는 것은 소망들인데 아이가 자라도록 도와 주는 본래 한 가지 소망은 커서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는 늘 ‘어른’놀이를 즐기며 어른들의 생활을 보고 알게 된 것을 놀이에서 흉내낸다. 아이가 이 소망을 감출 이유는 없다. 어른은 사정이 다르다. 한편으로 오른으로서 놀이라든가 공상을 즐겨서는 안 되고 현실에서 행동해야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한편 공상을 일으키는 소망들 가운데 꼭 감추어야 하는 것들도 많이 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공상을 유아적이며 금지된 것으로서 부끄러워한다.
그것이 그토록 비밀에 휩싸여 있다면 인간의 공상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잘 알게 되는 것인가? 그런데 세상에는 고통의 대상과 기쁨의 까닭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이라는, 엄격한 여신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신경질환 환자들로서 정신요법을 통한 회복을 기대하는 의사에게 또한 그들의 공상을 고백해야 한다. 이 통로가 우리에게 최상의 지식을 갖다주며, 그 내용은 건강한 사람들이 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인 바, 이와 같은 우리의 추측은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공상의 주요 성격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행복한 사람은 한 번도 공상의 날개를 펴지 않고, 불만족스런 사람만 그럴 뿐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채워지지 못한 소망들은 공상의 추진력이며, 모든 개개의 공상은 소망의 충족, 불만족스런 현실의 교정이다. 사람마다 성, 성격, 그리고 주변 환경에 따라 실현하고자 하는 소원도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대표적인 두 가지 방향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당사자의 신분 향상에 도움이 되는 의욕적인 소망 또는 성애적 소망이 그것이다. 젊은 여자들의 경우 거의 전적으로 성적 소망이 주류를 이루는데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 사회적 욕망은 사랑의 노력에 파묻힌다. 젊은 남자의 경우 성적 욕망 말고 이기적, 야심적 욕망이 대종을 이룬다. 그렇긴 하지만 두 방향의 반대적 성격 말고 그것의 빈번한 결합을 강조하기로 하자. 많은 교회 제단의 그림들 구석에 헌화자의 초상이 보이듯이 대부분의 야심적인 공상에도 어느 귀퉁인가에는 귀부인의 모습이 발견된다. 사실 공상가는 그녀를 위하여 이 모든 모험을 수행하는 것이며 그 값진 전리품을 그녀의 발 앞에 늘어놓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생각을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을 잘 받은 여자에게 성적 욕구는 사실 최소한만 허용되어 있고, 젊은 남자는 응석부리던 유년시절부터 몸에 붙은 지나친 자기 주장을 비슷한 처지의 까다로운 개체들로 가득 찬 사회에 적응한다는 목적 의식에서 제어할 줄 알아야 된다.
이런 공상적 행동의 산물인 개별적 공상, 공중누각 또는 백일몽들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꼭 천편일률적이며 불변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변화하는 삶의 인상들에 적응하여 처지가 바뀜에 따라 변화하고, 작용하는 새로운 인상이 생길 때마다 소위 말하는 ‘시대의 표시’를 얻게 된다. 공상의 시간에 대한 관계는 아주 의미가 깊다. 공상은 말하자면 세 개의 시간, 인간 상상력의 세 시간 단위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상 작업은 지금 당장의 인상과, 즉 그 당사자의 중요한 소망들 가운데 하나를 일깨울 수 있는 현재에 있어서의 사건과 연결되는데, 대부분 유아시절에서 오는 옛날 체험의 기억이 현재의 입장에서 접근되는 것이다. 그때에는 이 소망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이 접근은 결국 미래의 상황을 연출하는데, 이 상황에서 바로 그 소망이 다시 실현되는 바, 그것이 바로 백일몽 또는 공상으로서, 여기에는 현재 사건과 기억에서 비롯한 흔적들이 담겨 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가 소망의 줄에 고스란히 꿰어 있는 셈이다.
가장 진부한 보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기로 한다. 당신이 가난하고 고아가 된 젊은이에게 어쩌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고용주의 주소를 주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곳으로가는 길에 그는 백일몽에 빠질 수 있는데 이는 그의 형편에 비추어 보아 가능한 일이다. 공상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일자리를 얻게 되고 사장의 마음에 들어 사업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매력적인 따님과 결혼을 하게 되고 그런 뒤 회사의 책임자로서 나중에는 사업을 떠맡게 된다. 그가 행복한 어린시절에 누렸던 것을 이제 그는 공상 속에서 실현한다. 아늑한 가정, 사랑하는 부모님과 애틋한 애정의 첫 대상들. 이런 보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체험에 따라 미래의 청사진을 펼치고자 소망이 바로 현재의 기회를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공상에 대해 말할 것이 또 많이 있겠지만 아주 간결하게 요점만 말하고자 한다. 공상이 지나치게 많아지며 너무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되면 정신질환 또는 정신병에 빠질 조건이 갖춰진다. 공상 또한 병 증상의 바로 그 전단계로서 환자들이 호소하는 것이 이런 고통의 증상들이다. 병리학에 이르는 수많은 옆길이 여기에서 가지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산의 꿈에 대한 관계를 지나칠 수 없다. 우리가 밤마다 꾸는 꿈 또한 이런 공상과 다르지 않다. 이 점은 꿈의 해석을 통해 분명해진다. 언어는 공상가의 뜬구름 같은 생각들을 ‘백일몽’이라고 부름으로써, 놀랍도록 현명하게 꿈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이미 오래 전에 마무리지었다.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꿈의 의미가 대부분 뚜렷하지 못하다면, 그 까닭은 그 꿈이 부끄럽고 또 자신에게도 숨겨야 하는 것들인 나머지, 억압되고 무의식으로 밀려가 있는 그런 소망들이 밤이 되면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디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된 소망과 그 떨거지들한테는 이제 형편없이 왜곡된 표현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꿈의 왜곡에 대한 학문적 작업을 통한 설명이 성공한 상태에서, 밤에 꾸는 꿈이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공상인 백일몽과 같은 소망의 충족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하등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상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끝내고 이제 작가를 보기로 하자! 과연 작가를 ‘대낮의 몽상가’와, 그의 창작을 백일몽과 비교해도 되는 것인가? 여기에서 첫 번째 차이가 부각된다. 고대의 서사 시인과 비극 작가처럼 완결된 소재를 빌려오는 작가와 소재를 자유롭게 창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를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후자의 경우를 더 살펴보자. 우리의 비교에 적합한 작가는 평론가들이 호평하는 작가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까다롭지 않은 소설, 단편, 이야기를 써서 수많은 열광적인 독자를 확보하는 작가들이다. 이 작가들의 작품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들 작품에는 모두 관심의 초점을 이루는 주인공이 있어 작가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주인공에 대한 우리의 성원을 얻으려 애쓰며, 특별한 운명으로써 그 주인공을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어떤 한 장에서 주인공이 의식을 잃고 중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으로 끝나면, 다음 장은 틀림없이 그가 극진한 치료를 받으며 회복되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소설의 1권이 폭풍을 만난 배가 침몰하는 것으로 끝나면, 제 2권에서는 그 배의 기적적인 구조로 시작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설은 계속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확신의 느낌을 가지고 독자는 주인공의 위험한 운명의 여로를 동반하는데, 바로 이 확신감이 있기에 실제 주인공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자 물에 뛰어들거나,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자 총알에 몸을 맞기는 것이다. 독일 문학의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본래적 영웅감을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네게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안첸그루버). 내 생각으로는 그러나 불사신이라는 속이 비치는 이 특징 속에서 힘들이지 않고 모든 백일몽과 소설의 주인공, 왕으로서의 나라는 존재를 읽어 볼 수 있다.
자아중심적인 이런 소설의 또 다른 전형적 특징들이 동일한 성격을 보여준다. 소설의 여자들이 모두 늘 주인공을 사랑한다면 이것은 현실의 묘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백일몽의 필수적 요소라고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들이 선인과 악인으로 분명히 나뉘어질 때, 이는 현실에서 관찰되는 인간 성격의 다양성을 포기하고서만 가능한 일이다. ‘선인’들은 주인공이 된 자아의 협조자이지만, 그러나 ‘악인’은 그 자아의 적과 경쟁자들이다.
아주 많은 문학 작품이 소박한 백일몽이라는 기본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시을 우리가 결코 모르는 바는 아지만, 그러나 극단의 변종들 또한 빈틈없는 일련의 중간 단계들을 통해 이 기본꼴과 관계될 수 있다는 추측을 아무래도 나는 억누를 수 없다. 수위 심리소설의 많은 작품 안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주인공만이 내부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눈길을 끈다. 그의 영혼 속에 말하자면 작가가 앉아서 다른 인물들을 외부로부터 살피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심리소설은 자신의 자아를 아아 관찰로써 부분자아를 분열시키고 그에 따라 그의 내적 삶의 갈등 물길을 여러 인물들에게 인격화시키는 현대 작가의 독특한 경향에 힘입고 있다. 백일몽이라는 전형과 완전히 대립된 소설로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이 행동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오히려 마치 구경꾼처럼 다른 인물의 행동과 고통을 수수방관만 하는 ‘궤도에서 벗어난’ 소설을 들 수 있겠다. 졸라의 후기 소설에 이런 작품이 여러 편 있다. 그렇지만 작가가 아니면서 여러 면에서 소위 규범에 벗어난 개인들의 심리적 분석을 통해 백일몽과 유사한 변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밝혀야겠는데, 이 변형들에서는 자아가 구경꾼의 역할에 만족한다.
작가와 대낮의 몽상가, 문학 작품과 백일몽의 동일화가 의미를 갖자면 무엇보다도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생산성이 증명되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내세웠던 세 가지 시간과 그것을 꿰뚫는 소원에 대한 상상의 관계에 대한 공식을 작가의 작품에 적용하여 작가의 인생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그것의 힘을 빌어 연구해보면 어떨까. 어떤 기대상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지 일반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 관계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 공상에서 얻어진 통찰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강렬한 현실적 체험이 작가 안에 옛날의, 대부분 유년시절에 속하는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바, 이제 이 체험으로부터 작품 안에서 실현되는 소망이 비롯한다. 작품 자체는 생생한 자극의 요인, 옛 기억의 요인들을 다 보여준다.
이 공식의 복잡함에 놀랄 필요는 없다. 실제로는 그것이 너무 일방적 도식으로 판명되리라 나는 추측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 진상으로의 첫 접근이 담겨 있을 것이며, 내가 이미 몇 가지 이런 시도를 해 본 상태에서는 문학 생산품의 이와 같은 관찰 방식이 결실을 맺게 되리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삶에서 차지하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어쩌면 낯설 만큼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작품과 백일몽이 옛날 아이들 장난의 계속이며 대체라는 전제에서 제일 먼저 유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은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창작물이 아닌 완결된, 알려진 소재의 문학화가 실현되고 있는 종류의 문학 작품들을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소재의 선택과 그 소재의 상당한 변화를 통해 부분적 독자성이 작가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 소재들을 누구나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신화, 설화와 동화라는 민중의 보고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심리학적 형성물의 분석이 완결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예를 들면 신화로부터 그것이 모든 국가의 소망공상의 왜곡된 잔여물, 오래되지 않은 인류의 세속적 꿈과 일치할 것임을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 강연의 제목에서 먼저 언급되고 있는 작가에 대하여 공상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이야기된 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가 활발하지 못하다는 변명으로써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리는 바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공상의 연구로부터 문학적 소재 선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독자 여러분께 자극과 도전을 일깨울 따름이다. 작가가 어떤 방법을 가지고 독자에게 작품을 통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또 다른 문제에는 전혀 손도 대지 못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공상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서 시적 감동의 문제로 어떻게 길이 통하는지 짧게나마 다루기로 한다.
백일몽자들이 그의 공상을 부끄러워 할 이유를 느끼고 있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그것을 세심하게 감춘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나는 이제 거기에 덧붙일 것이 있는데, 설령 그가 그것을 알려준다 하더라도 이런 폭로를 통해 아무런 즐거움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공상을 우리가 알게 되면 혐오감을 갖게 되거나 잘해봤자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자기의 유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거나 또는 자신의 개인적 백일몽이기 쉬운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로 전달하면 우리는 수많은 원천에서 흘러 모여드는 비상한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가 그것을 실현시키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비밀이다. 모든 개체로서의 자아와 다른 자아들 사이에 생기는 장애와 관련되는 혐오감의 극복이라는 기술 속에 본래적인 창작의 비밀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기술 가운데 두 가지를 소개한다. 작가는 이기적인 백일몽의 성격을 변화와 은폐를 통해 줄이며, 공상의 묘사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순전히 형식적, 다시 말해 미적 쾌감 획득으로써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런 쾌감 획득을 유혹의 프리미엄Verlockungsprämie 또는 앞선 쾌감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의 효과는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심리적 원천에서 더 큰 쾌감을 끌어오는 데 있다. 작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미적 쾌감은 이런 앞선 쾌감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작품의 본래 재미는 우리 영혼 안에 있는 긴장들의 해방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아무런 질책을 받지 않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공상을 즐길 수 있도록 작가가 우리를 성공적으로 도와주는 데가지 적지 않게 기여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흥미로운 그리고 뒤얽힌 연구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번만은 이것으로써 우리의 논의를 끝내기로 한다.
# by | 2009/04/15 23:13 | Dust in the Wind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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